성지 주일

주보 강론

수난기를 읽으면서...

오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다. 매일 미사에는 다섯 단계로 역할을 분담해 놓고, 역할을 나누어서 복음을 읽을 수 있게 해 놨다. 이제껏 사제로 살아오면서 거의 수난기는 여러 사람이 역할을 분담하여 읽었고, 내가 혼자서 읽은 것은 특별한 경우로 많지는 않았다. 어떤 때는 노래로 수난기를 읽기도 하였고, 어떤 때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신자들의 외침이 서운하게 들리기도 하였다. 신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것이 본심은 아니겠지만, 그 앞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읽는 사제로써는 뜨끔하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지 못하기 때문에 보좌신부와 두 분 수녀님들과 미사를 드리면서 수난 복음을 역할을 나누어서 읽었다. 수녀님이 해설과 몇몇 사람들 역할을 하고, 보좌신부님이 예수님 역할을 하였고, 나는 다른 한 사람의 역할을 하면서 빌라도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매번 예수님 역할만 하다가 반대자의 역할은 새로운 느낌이었고, 예수님의 수난 사건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되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는 아주 자상한 분이시다. 제자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다 응답을 해 주셨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어느 시점에서 끝난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난 후에 사람들의 목소리가 크게 들린다. 대사제는 예수님께 대답할 것을 명령까지 한다. 세상은 바빠지고 시끄러워졌다. 그러나 예수님은 침묵하신다. 빌라도가 매우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예수님은 전혀 말을 하지 않는다. 거짓 증인들이 나와서 당신을 고발할 때에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분은 침묵을 지키신다.

왜일까? 당신이 마실 잔으로써 십자가의 고통을 받아들이신 것일까? 그럴 수도 있겠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하고 당신의 말씀을 하신다. 아마 십자가의 길에서 오로지 아버지만을 바라보면서가는 진리의 길을 가셨다고 생각한다. 진리의 길을 가는 중에 모든 거짓은 배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 속에는 거짓이 많이 등장한다.

무엇이 거짓일까? 유다 이스가리옷의 거짓이 보인다. 그는 은전 서른 닢을 받고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리면서 주님의 식탁에 앉아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은 “주님”이라고 예수님을 부르면서 질문을 하는데, 유다는 “스승님”이라고 다른 호칭을 사용한다. 예수님을 잡으러 와서도 “스승님”이라고 예수님을 부른다. 그는 예수님께서 사형선고를 받으신 후에 뉘우치고 목매달아 죽는다. 그에게 예수님은 주님이 아니고 스승이었을까?

거짓에서 베드로도 자유롭지 않다. 그는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장담하지만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하기 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 한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잠을 자고 있었다. 

수석 사제들과 온 최고 의회, 그리고 대사제의 거짓이 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려는 목적을 정하고 거짓 증언을 찾았고, 두 명의 거짓 증인들에게서 꼬투리를 잡아서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려고 온갖 시도를 한다. 그들은 빌라도에게 몰려가서 예수님을 고소하고, 군중을 구슬려서 바라빠를 풀어주도록 요청하고 예수님을 없애 버리려고 한다. 지금 세상의 거짓스러운 모습의 한 부분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이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카르텔을 지키기 위해서 온갖 추잡한 일들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빌라도는 어땠을까? 그는 실질적인 권한을 가진 사람이다. 옳고 그름을 따지고, 억울한 죽음이 나오지 않게 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 그는 예수님을 사형에 처할 마땅한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도대체 그가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라고 군중을 향하여 비겁하게 책임을 전가시키면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모습이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책임이 없소, 이것은 여러분의 일이오.”라고 하면서 손을 씻지만 결국은 예수님을 넘겨준다. 이 사건으로부터 자유롭고 싶겠지만 그렇지 않다.

십자가의 길에서 또 십자가 아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은 그 내용으로 그분을 조롱한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 그분이 보여주신 기적들이 이 순간에는 어디에 갔을까? 진실한 친구는 내가 어려울 때 보이고, 진실함은 고난 중에 보이게 된다. 평소에는 가면을 쓰고 있어서 누가 진실한 사람인지를 알 수 없다. 십자가의 길은 여러 사람들의 속마음을 잘 드러나게 하는 무대와 같다. 거짓을 감추고 있던 가면들을 벗겨버리는 곳이 바로 십자가의 길이다.

한국에서 큰 선거가 있다. 코로나 19로 이곳에서는 선거를 치룰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생각은 하여 보자. 후보와 정당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과거에 선 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권력을 잡으면 선해 질까? 과거에 국정을 잘 이끌지 못했던 정당이 권력을 잡으면 국민들을 중심에 두고 일을 할까? 거짓을 일삼던 사람들이 권력을 잡으면 진실해질까? 과거 세월호와 용산참사등 수많은 사건에서 숨기고 왜곡하여 진실을 덮으려고 했던 부도덕했던 사람들이 절대 권력을 잡으면 바뀔까?

십자가의 길은 적어도 권력이 예수님에게서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 넘어간 것이다. 거기서 아무도, 정말 아무도 예수님의 편에 서 주지 않는다. 오히려 힘을 갖게 되니까 그 힘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권력욕을 채우고, 정의로우신 하느님마저도 없어져야 할 사람으로 목표를 세우고 거짓 증언을 통하여 모함하는 모습이다. 

우리에게 거짓과 진실을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한국천주교 주교회의가 제 21대 국회의원 선거를 맞아 각 정당에 정책 질의서를 보냈는데, 더불어 민주당과 민생당은 적극적으로 응답을 하였고, 미래통합당과 정의당, 그리고 국민의 당은 ‘답변을 하지 않겠다’라고 답변 해 왔다. 답변을 하지 않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주교회의의 질의서가 무시당해서 대단히 불쾌하다. 앞으로 교회가 추구하는 일에 얼마만큼 그들이 협조할지 몹시 의심스럽다. 

세상은 세상이고, 하느님은 하느님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의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역할을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일은 없어야 한다. 

 

예수님은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고 외치면서 죽음을 맞이하신다. 모든 거짓의 소란들이 끝나는 순간이다. 이제 하느님과 예수님에 의하여 구원의 완성이 이루어진다. 

사람들의 시선과 비난과 거짓과 소란 등을 뒤로하고 하느님께서는 실패한 것 같은 당신의 구원 사업을 완성해 나가신다. 이것이 부족한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사랑 가득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이시다. 우리의 신앙은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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